과거의 흥미로운 이야기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 히틀러에게 공산당을 쳐부술 구실이 된 사건

유용y 2024. 9. 13. 05:00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히틀러에게 공산당을 쳐부술 구실이 된 사건

AI 생성 그림


 

 

1934110, 24세의 네덜란드 사람인 마리누스 판 테르 루베가 방화죄로 처형당했다. 그럴 만했다. 그의 죄목은 독일 베를린의 으리으리한 국회의사당 라이히슈타크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는 거니까.

 

하지만 이런 처형은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았다. 나치스를 증오한, 공산주의자였던 판 데르 루베가 정말로 방화를 저질렀을까? 아니면 그는 마침 좋은 빌미를 잡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 지지자들의 무고한 제물이었을까?

 

이 화재는 독일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은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가 독일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화 사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한스 플로터라는 신학도였다. 그는 1933227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날 무렵, 의사당 건물 서남쪽 모퉁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조용해야 할 국회의사당에 돌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플로터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2층 발코니에 뭔가 불타는 것을 손에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목격하자마자 한스는 경찰관에게로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관은 의사당 현관 쪽으로 달려가서, 2층에 있는 창문과 창문으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남자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오후 940분경, 60대의 소방차가 현장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었다. 장엄한 본회의장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고 의사당의 다른 장소들에도 군데군데 불이 붙어 있었다.

 

국회의사당의 이곳저곳을 수색하던 경찰이 비스마르크 홀에서 땀에 흠뻑 젖은 반라의 남자를 체포했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으로 남자의 이름이 마리누스 판 데르 루베라는 것이 밝혀졌다.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느냐는 심문에 대해, 그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항의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다른 3개의 공공건물에도 방화를 저지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백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폭도에 의해 불에 탔다고 생각해 보아라. 지금도 충격이었을 이 방화 사건이 당시 독일에 안겨다 준 정치적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독일 총리로 취임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삼아 의회를 장악하고, 3 제국의 총통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심복인 헤르만 괴링이 방화 사건과 판 데르 루베의 체포 경위를 보고하자 히틀러는 대번에 반색했다고 전해진다. ‘이건 하늘의 계시다. 공산당 봉기의 시작이다. 모든 공산당 간부를 총살해야 한다. 오늘 밤 모든 공산당 소속 의원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 일말의 동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히틀러는 독일의 의회를 반공주의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나치스 당원이 의사당에서 최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좌익 세력이 그들의 독재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5,000명의 공산당원이 갑자기 체포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4명의 공산당 지도자가 방화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독일 정치계는 그것이 나치스의 억지 주장임을 알고 있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에 공산당원들을 구출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히틀러의 수작에도 불구하고, 193335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전권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3분의 2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들의 득표율은 고작 44%에 불과했다.

 

 

 

단독범이 아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공산당의원들의 의회 출석을 방해함으로써 히틀러는 자기가 이끄는 내각에 멋대로 전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겨우 통과시킬 수 있었다.

 

베를린 소방서의 전문가들은 방화는 단독 범행일 수 없으며 적어도 6명 내지 7명의 공범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치스 당원들은 그 공범자가 모두 공산당 소속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이프치히 법정은 판데르 루베의 공범 혐의자 4명을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히틀러는 물러서지 않았다. 화재 사건을 공산당원들의 소행으로 돌리고, 정신박약자인 판 데르 루베를 공산당원 중 한 명으로 낙인을 찍은 뒤 곧바로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은 나치스가 스스로 계획한 방화였다는 것을 알았다.

공산당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효과적인 선전 공세로 반격을 가했다. 히틀러의 측근인 괴링과 그의 공범자들이 지하도를 통하여 의사당 건물로 들어가 불을 질렀고, 그대로 오던 길을 되돌아 나온 것이라고 시사했다.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세계 2차대전 후 실시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 참모총장 할더 장군은 ‘1942년에 괴링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다. 불을 지른 게 나니까라고 자랑하더라고 증언했다.

 

 

마지막 결론

 

괴링은 할더 장군의 증언을 부언했지만, 나치스가 배신과 속임수의 명수라는 것은 세상에 공공연히 다 드러난 사실이었다.

의외로, 마지막 결론은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후에 내려졌다.

 

판 데르 루베는 4다발의 불쏘시개와 한 통의 성냥을 사용하여 순전히 자신의 의사에 따라 불을 질렀던 것 같다. 괴링의 부하들은 기껏해야 소방 활동을 방해하는 데 그쳤던 듯하다.

 

죽은 판 데르 루베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모른다. 나치스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위해 루베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치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